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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4-06-02 15: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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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1
제목 : | 누구의 죽음도 소외되선 안돼요 - 현대불교뉴스(5월30일)

죽음 '화두'… 호스피스 활동 시작
2000년 충북 미원면에 ‘정토마을’세워
올 6월 15일 자재요양병원 개원 예정
완화의료 목적… 승가병동 등 총 108병상
1만5천 후원자 및 봉사자와 원력 불사
20년 돌봄 수행의 결실

 



▲ 능행 스님은 … 1994년 조치원 학림사 수환 스님을 은사로 출가 출가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수료했으며 조계종 자원봉사단 충북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독립형 호스피스센터 정토마을 원장, 동국대 총동문회 이사,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이사, 재단법인 정토사관자재회 이사장, 한국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협회 교육이사, 마하보디임상전문교육원 원장, 조계종 포교원 산하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 상임이사,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병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재)대한불교진흥원 제3회 대원상 단체부문 대상 수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수상, 제24회 불이상 실천분야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산문집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임상전문서적 〈불교 임상기도집〉, 산문집 〈이 순간〉 등이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죽음과 삶은 두 다리와 같습니다. 한 쪽 다리를 내밀면 삶이고 다른 한 쪽을 내밀면 죽음이 되는 거죠. 둘은 서로 공존하며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 하나만 바라보고 집착하며 죽음을 외면합니다. 결국 해탈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삶은 다시 재생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하죠. 즉 죽음은 다음 생을 준비하는 다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되고 수행하며 다음 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완화의료시설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이하 자재요양병원)의 개원을 앞두고 있는 능행 스님(자재요양병원장)은 죽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죽어가는 말기암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능행 스님의 20년 넘는 보살행은 생명 경시 사상이 만연한 이 시대에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 정토마을 자재요양병원 전경

 

무연 자비의 실천이 개인·사회 살린다

자재요양병원의 개원식이 6월 15일로 다가왔다.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자재요양병원은 연면적 2,887.52㎡ 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108병상을 갖추었다. 1층 호스피스 병동, 2층 재활병동, 3층 승가병동 등이 있으며, 내과 가정의학과 한방 등을 진료한다. 스님들은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1인실, 특실, 특수치료, 보약, 영양제 등의 비수가 부분은 개인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자재병원은 치료를 통한 재활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완화의료 병동 환자들을 위해서는 전인적이고 영적인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님은 2000년 충북 미원면에 호스피스 시설 정토마을을 건립해 말기암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불교계 호스피스 시설이 전무후무했기에 희망자는 많은데 수용인원은 15명뿐이었다. 몇 개월을 기다려 들어와야 하니 스님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진료부터 임종까지 돌봐줄 수 있는 병원 건립을 발원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정토마을 설립 당시인 1990년대 말만 해도 요양시설이 너무 부족했어요. 특히 불교계는 이런 시설이 드물었죠. 스님들은 부처님 곁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울 수밖에요. 이런 이유로 정토마을을 설립했지만 15명 밖에 수용할 수 없으니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을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병원 건립을 원으로 세웠습니다.”

정토마을 설립에서 자재요양병원 건립까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스님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산을 넘으면 바다가 있고 바다를 건너면 또 다른 험한 숲이 있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스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원력을 갖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고통을 분담하면 가족이 살고 사회 전체가 밝아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저희 환자분 중에 그런 분이 계셨어요. 보살님이 암에 걸리셨는데 병간호를 하던 거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고 사업도 망했죠. 당시 아들은 군대에 있었고 딸은 스물네살의 교사였는데 월급은 차압을 당해서 오갈 데가 없었어요. 보살님이 정토마을에 오면서 딸에게는 파산신청을 권유하며 교사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었어요. 군대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 했는데 이렇게 집안 문제가 해결되자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해요. 보살님은 6개월 후에 정토마을에서 편안히 눈을 감으셨어요. 결국 저희는 환자 한 분을 거뒀는데 가족이 희망을 찾은 셈이 됐죠.”

상대가 누구이든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떠안아 주는 것이 복지의 할 일이라고 말하는 스님. 스님은 이를 무연자비의 실천이라고 표현한다. 병자 한 명을 구하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삶에 안정을 얻게 된다. 또 더 나아가서는 사회도 건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한다


▲ 한손으로 기도를 했던 故 성오 스님과 함께

 

한 손으로 목탁 치며 기도해준 도반

스님이 2003년부터 병원건립을 계획해 2005년 울산에 부지를 갖추고 완공까지 총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병원 건축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모연을 통해 병원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래서 이 일은 혼자 한 일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이 모여 이루어낸 일이라고 전한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1만 5천명의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분들께 큰 감사를 드려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정토마을에 10년 동안 함께 했던 도반 성오 스님이에요. 스님은 반신불수의 몸으로 기도를 하며 안을 지켰고 저는 탁발을 하러 다녔죠. 개원을 앞둔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성오 스님입니다.”

성오 스님은 2001년, 동안거 중 쓰러져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어 정토 마을로 들어왔다. 능행 스님은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죽을 쑤어 스님의 코로 호스를 연결해 영양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성오 스님이 어느날 눈을 떴고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스님은 오른쪽 전신과 언어기능이 마비되었고 문자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그간 외웠던 경전도 다 잊어버린 상태. 성오 스님은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글씨를 익혀 나갔으며 반야심경과 천수경도 새롭게 외우기 시작했다. 능행 스님은 그 즈음 병원 건립을 발원하고 탁발을 하러 다녀 기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성오 스님은 자신이 기도를 하겠다며 자처했다. 그때부터 정토마을 5평 남짓한 법당에서 스님은 왼손으로 목탁을 치며 기도를 시작했다. 기어서 가거나 혹은 간호사의 등에 업혀서 법당까지 가야 했지만 성오 스님은 하루 세 번의 기도를 놓치지 않았고 그렇게 천일의 기도가 이어졌다.

“자신의 육체기능(특히 심장기능)을 20% 밖에 사용할 수 없었는데 스님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셨어요. 스님이 안을 지켜주셨기에 제가 밖을 돌며 탁발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스님의 천일기도가 끝나자 울산의 자재요양병원 부지가 확보됐어요. 그리고 때마침 제가 쓴 책이 많이 팔려서 인세를 받아 그곳에 교육시설 하나를 지을 수 있었죠. 스님께서는 병원이 절반 정도 완공 될 즈음 기다리기 너무 힘들다며 이제는 저 혼자 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그렇게 가셨어요. 정토마을에 들어온지 꼭 10년만이었죠.”

성오 스님의 바랑에는 정토마을 사람들과 풍경 사진이 유산으로 남아 있었다. 능행 스님이 사준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왼손으로 찍어낸 사진이었다. 능행 스님은 성오 스님 얘기를 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간 병원 짓기에 바빠서 제대로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는 능행 스님은 개원을 앞두고 성오 스님 생각이 너무 난다고 했다.

 

도망가려 했지만 언제나 그 자리

스님은 故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법정 스님과 같이 고요하고 청정한 삶을 발원했던 스님이 이렇게 호스피스 활동에 뛰어든 것은 죽음 앞에 너무나 처절해지는 인간의 고통을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1988년부터 불교봉사단체 자비회를 설립해 소외이웃을 돌봐오던 스님은 1992년 말기암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음이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 의문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는 죽음이 궁금해 말기암환자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죽음을 돌보면서 정말 사람들이 들짐승처럼 죽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처님께서는 분명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모두 존귀한 존재인데 그 존재가 왜 저렇게 죽어 갈까? 이렇게 발달된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이 이렇게 소외되고 비참해서야 되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들을 잘 보내드리고 다음 생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스피스로 활동을 하면서 스님은 수행만 하다가 토굴에서 외롭게 병들어가는 수좌 스님들의 죽음, 이웃 종교 시설에서 생을 마무리 해야 하는 안타까움 등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죽어가면서 불교인들이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나갔다. 여기에 온몸으로 자비를 실천하며 공익을 위한 삶을 살라는 은사 수환 스님(조치원 학림사 주지)의 간곡한 당부에 힘입어 정토마을 설립을 추진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너무 겁이 났어요. 그래서 누구한테도 말 안하고 대만으로 갈 생각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겁나서 도망가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가기로 한 지역에 큰 지진이 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즈음 어느날 화성 자재정사 묘희 스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1억원이 든 바랑을 안겨 주셨죠. 이 일은 꼭 제가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면서 저를 차에 태워 정토마을 부지에 내려놓고 가셨어요.”

스님은 그 돈으로 수도와 전기 시설을 설치하고 두 평 짜리 콘테이너 박스 한 동을 사서 기도 하면서 정토마을 불사를 시작해 2000년 정토마을을 설립했다.

“밤낮 없이 환자들을 돌봤어요.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이었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의 죽음은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죠. 여기에 시설을 운영하려면 한 달에 3천 만원 정도 필요했는데 한 달이 지나면 통장의 잔고는 거의 바닥이었죠. 자신이 없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3일 동안 집을 나간 적도 있었어요. 물론 우리 식구들은 제가 탁발을 나갔다 생각했지 아무도 가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죠.(웃음)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다시 서있는 곳이 정토마을이었습니다. 그때 결심을 했죠. 그리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죠. 이제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그리고 기꺼이 이 생을 여기에 던지겠다고.”

늘 법정 스님과 같이 청정히 수행하는 삶을 동경했던 능행 스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을 돌보는 일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스님은 다시는 다른 삶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분의 삶을 동경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번도 법정 스님을 뵌 적은 없어요. 법정 스님 입적 이후에 삼제 때 길상사를 찾아간 것이 전부죠.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지금 제 삶은 법정 스님의 맑은 삶을 또 다른 길에서 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요.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가 할 일입니다.”

 






▲ 2005년 정토마을 식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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