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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고관리자
작성일
2012-02-21 20:58:40
조회수
1562
제목 : | 문디~~자슥

어제밤 꿈속에서 ...

꿈속에서 자운~을 만났다.
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겠다며 살아있을 때처럼
빨간 모자를 써고 날 찾아 왔다.
아이구 이게 누구여 ~~자운거사님 ~!
반갑게 손을 잡아 더니 ~씽긋 하고 웃는다.
어디가 얼마나 아푸요 입 좀 벌려 봐요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다 .
깨고 나니 새벽 3시 영~~엉 잠이 오질 않는다.
작년 12월 31일 그가 떠나던
날이 아픔이 달처럼 떠오른다.
우리 자운거사님은 부산의료원행려병동에서 만났다
몇 년을 두고 스님 부산자주 오기를 기다리며
만나면 반가운 인연 으로 지내다가
죽기2 년 전에 정토마을로 왔다
병명은 백혈병 과 합병증으로 당뇨 가
있었고 나이는 46세 생보호대상자
로 등록 되어 있었다.
구구절절 사연도 많은 인생...
참 예의바르시고 중병을 6년째 앓고
투병 중에 있었지만 늘 밝았다
매주 혈소판 8개 혈액 3~4개 씩 육년을
그렇게 맞으면서 살아왔다
정토마을에 와어는 대체로 상태가 양호 하여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일도 도와주었다
때로는 보약을 먹이기고 했지만 철분이
간에 쌓이면서는 그것도 여의치가 못했다.
어제나 명절이 되면 부산에 형이 있다고
명절을 지내러 가곤하였다
자운이 살아 있을 때는 혜송이랑 선재도 함께 있었다.
혜송이도 백혈병 선재는 다른 질병으로
치유단계에 있던 20대
아이들 이었다.
내 방 문 앞에서 날씨좋은날에는 베드민터
그리고 발야구 등도 하며 자짱면 내기도 하고 ~~
큰 웃음소리가 구녀산에 가득하였다
같은 병명으로 투병중인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삼춘 과 조카처럼 잘 지냈다
이맘때 ~~
황사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혜송 이는 손 쓸 수 없이
제발 하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늘 병원 에 함께 가어 혈소판 맞고
피 맞고 자운거사님은 한기가 잘 들어 혜송이가
항상 작은 이불을 들고 가곤하였다
정토마을 간호과장님 참 많이도 마음 아파했다
이 두 분을 대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아야 했기에 ...
정이 얼마나 들었을까 ...
헤송 이는 처절하게 여름장마비가
내리던 날 죽었다
혜송이 유해가루가 담긴 상자가 정토마을대문을
들어오는 날 자운은 어굴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
비가 청대 같이 오는 중에 선재랑 자운
그리고 우리 김정모실장 이 구녀산 모퉁이에다가
뼈 가루를 뿌리고 내려왔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사람이 없었다.

 

침묵 ~~
깊은 침묵이 며칠을 흘러갔다
자운거사님의 표정이 자꾸 어두워 갔다
어깨와 고개가 처지고 밝게 웃는
모습을 잃어 만 가고 있었다.
스님 ~! 나 두 혜송 이처럼 죽을 꺼에요
(투명스럽게 말하곤했다)
혜송이의 죽음을 보고 치유의 희망을
점점 상실 하고 큰 절망감에 빠진 것 같았다 .
평소에도 몸에서 피비린내가 많이 났는데
혜송이 가고부터는 더욱 심하게 냄새가 나고
잇몸에서도 계속 출혈이 되어 자주
큰 병원에 입원을 시키곤했다.
정토마을 온 가족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간호를 했다
당뇨도 수치가 많이 올라가고
점점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 하였다
빨리 낳아서 스님 차도 몰아주고
병원도 같이 짓겠노라고 약속해놓고
점점 약해지며 병색이 깊어지고 있는
자운을 붙잡고 많이도 격려했건만 ...
여름에 혜송이가 떠나고 채 깊은 상실감이
가시기도 전에 자운거사님이
입퇴원 을 몇 번을 거듭하면서
우리를 준비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보내고 싶지 않았다
좋은 치료제가 나올 때 까지
최선을 다해 살려 보고 싶었다.

일본에 어린아들하나와 아내가 있다며
늘 ~~~아들자랑을 하곤했다
어서 나아서 함께 살고 싶다고 ...
부산의료원에서 받은 서류에는 독신으로 혼자였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족구성원들이 있다고 말했다
엄청 자존심이강하여 자세히 물어보기도 그렇고
아픈 상처를 더 아푸게 할까봐 늘 우리는 조심했다
매달 용돈을 30만원씩 드렸다 그리고 생보호로
나오는 돈하고 한달에 개인용돈 약 70만원정도를 가지고 썼다
늘 나는 돈 아껴써고 모아서 나중에
아들 만날 때 쓰라고 잔소리를 했다
12월31일 제야의 종이 울리고 새날이
밝아올 한해의 마지막 날 밤 ...
저녁나절 어째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자운~!
어디가 많이 아푸요 ?
스님 배가 아파요
배가 ?
병실에다 눕히고 따습게 하여 좀 자도록 하였지만
두어 시간이후에 간호사실로 나왔다
배가 너무 아푸다고 ...

간호과장님이 차로 모시고 청주 성모병원 응급실로 또 갔다
나는 초초히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배가 아플까 ?
약 한 시간 후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간호과장 목소리가 떨리면 들러왔다
스님~! 휴 우 (한숨소리가 깊다)
자운거사님~~
스님~! 말끝을 흐린다.
왜 ~~?
배가 어째서 아푸데 ~엉
그게 아니고요 ~~간에 철분이 너무 쌓여서
간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래요 그래서 오늘 밤을 못 넘긴데요
아~~하 ~~이게 뭐람
뭐라고 간이 멈 추어다고 기능을 ...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많은 사람들을 보내건만 어찌 자운은 죽음을 수용할수 가
~~아니 보낼 수가 없었다.
4~5년 투병을 지켜본 나는 그에게 더욱 진한 애착이 있는 것일까?
온 식구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나는 차를 어떻게 몰고 병원을 어떻게 갔는지
기억조차도 안난다.
응급실에서 초롱 그리는 눈으로 나를 맞이하던 자운거사님
스님 ~피곤한데 뭐하러 나온는교
난 속으로 이 문디자슥 이게 뭐꼬 )) 중얼 그리면 닥아갔다.
무슨 간이 기능이 멈추었다는데 설마
금방은 죽겠는교
나 안죽어요 ~~스님 ~~이카믄서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자운거사 ~~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을까?
스님 혼자 두고 떠야할 일을 생각했을까 .
걱정 마이소 ~연신 웃음을 보여주던 자운거사님
나는 조용히 의사를 다구 쳤다
좀 살려 보라며
오늘밤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며칠이라도 살려달라고
가족을 찾아야 하노라면 허둥대는 모습이
흡사 자식을 영 떠나보내는
에미 같았다.
자운은 중환자실로 옮겨 갔다 당직자만 남기고
전 식구들이 중환자 병실문앞에 모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떠날 수 가 없었다.
자운 ~!
녜 스님
거사님 오늘 밤을 몬넘기다니 어찌하면 좋겠소?
말똥말똥 한 눈으로 계속 날 바라보고 있다
영혼 속에 깊이 이승의 인연들을 담는 것처럼 ...
아버지 하고 형 어디에 있소 시님 가르쳐 주세요
찾아야 해요
일본 가족들은 ...

자운거사님은 내가 이렇게 물어 볼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낼 말씀드릴께요
아니 오늘 말해줘요
스님 ~내가 오늘 당장 죽습니까
낼 말씀드릴께요 낼 ~...
밖에 직원들은 자운거사님 핸드폰 입력번호를 살피고
수첩에 주소 연락처 다 살펴서 부산으로 전화를 하여
어딘가에 있다는 가족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경찰에 의뢰하고 우리는 난리가 났다
죽기 전에 가족한번 보고 떠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는 내 얼굴이 뚫어지게 바라보며
손만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밤이 흘러 새벽이 닥아 오고 있었다.
자운거사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
스님 곁에는 제가 있어야 하는데 ...
맞지요 ? 하시며 웃는다

스님 사람이 젤 무섭습니다
사람 덜겅 덜겅 믿지마이소 ~녜 ~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날 바라보더니
어느 놈이던 우리스님 괴롭히는 놈은 내가
죽어서도 가만히 안내비 둘끼다 ~!!!
걱정마이소 내 안죽심니더
눈동자에 힘을 준다.
우리자운거사님은 주민들이 3년을 대모 하는 것을
다 지켜보고 내가 검찰청으로 어디로 어디로 불러
다니는 것을 다 겪고 보면서 살았다
그 힘겹고 어려운 시절 우리자운거사는
늘 든든히 사천왕처럼 내 곁에서
날 위로해 주었고 힘이 되어주었다.
수백명이 정토마을을 확성기를 틀고
들어 왔을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병든 몸으로 내가 다칠까봐
문 앞을 서성거렸던 사람이다
저 세상 문 전 앞에서도 날 걱정하던 사람...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모두에게
나름대로 믿음이 없던 것 일까 ?
새벽 3시
자운거사님은 내 손을 놓는다.
스님 ~!
왜 ~~불러요 기운도 없는데
새벽 까지 안 죽었는데 오늘이야 넘기겠지요.
얼~넝 들어가서 옷이라도 깨끗이 갈아입고 오세요.
추워요 옷 따습게 입고 좀 씻고 그라고 오세요. ~ 녜
내 안 죽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자운거사님 ~! 아버지랑 애기 만나보고 죽어야 해요
알았소 ~!!! ~녜~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제발
손을 잡고 어서가라고 야단이다
들어가서 옷 따습게 입고오라고
선재야 ~!!!(선재를 부른다 )
스님 좀 모시고 들어가라 ~엉
중환자실에 ...
덕산 . 선재 .정모. 과장 . 부장 .곁에
세워두고 하는 수 없어
옷을 챙겨 입으로 들어 왔다.
스님 ~!
나 식구들과 함께 있을 테니 언넝 다녀 오세요
(무디자슥 ~에고 )
나는
( 이문디같은 늠 의사가 오늘을 몬넘긴다케는데 와저리보체노 )
혼자말로 중얼 그리면서 중환자실문을 열고 나왔다
내 금방 다녀올께요 (급히오느라고 옷을 어떻게 입고
와는지 나는 알지못했다 ) 밖에나와 날 살펴보니 적삼바람 이었다
새벽이라 차 가 없어서 정토 까지는 불과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막 방문을 열고 들어왔어 손을 좀 닦아야겠다싶어
수도를 향해가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간 이 덜컹 내려않는다
왜~~?
과장님이다
스님~!
자운거사님이 지금 막 혼수에 ....
이 나쁜놈 ~!
그렇게 갈려고 날 그렇게도 들어가라고 보첸것인가
그 손들고 그 옷 입은 채로 다시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새날 새 아침인가 ...?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니 의식이 없었다.
내가 들어오고 약 10분후에 한 많은 이승을 떠났다
눈을 뜬 채로 ...

한손으로 뜬눈을 누르고 한손으로
자운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어 보았다
좋은 약이 나올때 까지 참고 살아보기로 해놓고 ...
말 이 없다
아무 말 이 없다
어째 따나갈 수 있었을까
차마 떠 날 수가 없어 그렇게 날 집으로 가라고
떠밀어 단 말인가 ...
많은 환자를 보내지만 이렇게 상실감이 큰 적은 처음이다
자운의 얼굴에 흰 천을 덮어 중환자실
문을 열고나서려니 내 온 몸에서 몸서리가 쳐 진다
왜 ~왜~!!!!
진저리가 치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이놈의 죽음 정말 안 보고 싶어진다.
미치고 싶을 만큼 고통이 밀려온다.
내가 선택한 삶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끼고 후회를 해 보았다.

시설 좋은 청주 장례식장으로 자운의 시신을 모시고 왔다
시신을 안치시키고
밤새 가족을 찾느라 초죽음이 된 직원들은
모두 씻고 쉬어서 오라고
돌려 보냈다
나 혼자 텅 빈 영안실에 사진 한 장 턱 올려놓고
서로 바라보고 있자니 ...
무상바람이 허허롭게 불어 ~불어 뼈를 여미 오더이다.
너는 죽어 사진 한 장으로 나 투고
나는 살아 너의 허영을 보고 있는가?
텅~빈 영안실에 사진 한 장 앞에 놓고
밤이 오도록 그렇게 앉아있었다
무엇을 못해주었는가 ????
그저 후회스러운 마음만 차오를 ~뿐 ...
정토마을 가족3일장으로 하기로 하였다
선재가 상주가 되고 ...
착한우리선재가 얼마나 듬직하게 상주노릇을 잘하는지 ...
그동안 정토에서 2년 동안 살면서 인연 있던
봉사자 들이 많이 찾아주었다
더욱 나를 슬퍼 게 한 것은 ...
경찰에 의뢰하여 정식으로 신분 조회를 하고보니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놀라운 사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족이~없다니 ...

6살 때 길 잃은 아이를 어느 고아원에 서 대려다 키워단다
성도 이름도 고아원에서 지어주었다고 ...
커서 어느 날 일본으로 밀향 을 하여 그곳에서 살았단다.
그리고 일본에서 백혈병이 걸려서 한국 대사관을 통하여
본적이 있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 생보호카드 를 만들어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에 입원을 시켜다고 한다.
부산의료원에서도 약 2년정도 투병을 했을 것이다
그 병원 법당 보살님이 자식처럼 보살펴다 그를 ...
보살님 말씀에는 어린자식과 아내가
일본에 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어딘가에 가족도 있다고 ...
모두가 다 ~~사실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이는 혹시 하나 일본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지금도...

젊은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는가?
스님이 ~~그렇게 애타게 물었건만 ...
가족이 어디에 있는 냐고 ...
왜 ~~낼 말 해 준다고 하고 떠났을까
고아 란 사실이 자운에게는
아픈 상처 로 삶의 어두운 그림자 로 함께 했으리.
우리나라사람들의 편견이 그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행려병동에서 만나 4년 세월을 알고 지내건만 어찌 그리도
고아란 말을 못했을까
그럼 매년 명절 때는 자운 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나 ...
너무나 가엾고 불쌍하여 가슴에 메여졌다
화장하여 강가에 뿌리고 49제를 올렸다
자운이 떠나고 많은 시간이 흘러가지만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되새기고 싶지 않았을 게다.
자운이랑 혜송이가 치고 놀던 베드민턴을
누가 마당에서 치고 놀면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지금도
그래서 어디에다가 숨겨버렸다 꼭꼭
그렇게 떠나고 난후 한번 보였다
49제때 태워드린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에~고~~ 이승에서는 까맣고 시퍼렇고 얼굴모양
엉망이더니 극락이 좋기는좋은갑소 그렇게 단정하고 깨끗하니 ...
눈뜨니 꿈이었다.
자운이 늘 아들이 있다고 했기에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혹여 있다는 아들이 장성하여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올것같았서
사진이랑 기록카드 등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보관하도록 하였다.
그라고 지난밤 이가 아프다고 다시 보였다
자운 ~~~! 극락에는 치과가 없소 ?
지난~~시간을 되돌리면서 아침새소리를 듣는다.

 


자운 ~!
그리움이라 말 해야겠소
가슴밑바닥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니

자운 ~!
후회와 아쉬움 이라 해야겠소.
텅~빈 가슴바닥으로 바람이 불어 갑니다.

자운 ~!
서러움이라 해야겠소.
미처 아물지 못한 가슴바닥으로 돌돌 돌 물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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