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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2-02-22 17:34:50
조회수
1416
제목 : | 생사 ......
우리가 인생에서 가지는 가장 궁극적인 관심을,죽음,자유,고립,무의미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실존적인 역동적 갈등의 내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죽음

가장 명확하고 가장 쉽게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관심은 죽음이다. 우리는 지금은 존재하지만,언젠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올 것이고,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이것은 끔찍한 사실이며,인간은 이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고 반응한다. 모든 것은 인간의 존재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핵심적인 존재론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자각과 계속 살고자 하는 원함 사이에 있는 갈등이다.

 

자유

또 다른 궁극적 관심은 우리가 한 층 더 접근하기 어려운 자유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유라는 것을 모호하지 않은 긍정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고 쟁취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궁극적 관심에서 바라보는 자유는 두려움에 고정되어 있다. 실존적인 의미에서 자유라는 것은 외부적인 구조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과는 반대로 사람은 고유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잘 구성된 우주에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다. 오히려 개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세계,인생설계,선택 그리고 행동에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갖는 저자(author).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우리가 서 있는 아래에는 기초가 없다는 것이다. (nothing),공허,심연이 그것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역동에서 하나의 열쇠가 되는 것은 기초가 없는 것과 기초와 구조를 원하는 우리의 원함 과의 충돌이다.

 

실존적인 소외(고독)

세 번째 궁극적인 관심은 소외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소외나 개인의 소외(자기 자신의 부분으로부터의 고립)가 아니라,근본적인 소외,즉 피조물과 세계로부터의 소외가 다른 소외 아래서 근본적으로 기초를 무색하게 한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지는 문제되지 않고,실존적인 소외에는 최종적이고 연결할 수 없는 틈이 있다. 우리 각자는 실존에 홀로 들어가야 하고 홀로 떠나야 한다. 그래서 실존적인 갈등은 우리의 절대적 소외에 대한 자각과 접촉,보호를 원하는 것,좀 더 큰 전체의 부분이 되려는 것과의 긴장에서 오는 것이다.

 

무의미

네 번째 궁극적인 관심은 무의미다.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한다면,각자가 무관심한 우주 안에서 궁극적으로 혼자라면,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왜 우리가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만일 우리에게 미리 예정된 디자인이 없다면,각자 인생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각 개인의 창조의 의미가 개인의 삶을 지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전한 것인가? 이 실존적인 역동 갈등은 의미를 가지지 않은 채 우주에 던져진 의미를 찾는 피조물의 딜레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상호의존성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잘 죽어 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잘 죽어 가는 것을 배우는 것은 잘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철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죽음 앞에서만 인간의 자아가 태어난다."

생의 끝을 준비하려고 하고, 준비하는 사람 외에 삶의 진정한 맛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죽음을 떠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인 삶-죽음의 한계는 비교적 명료하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삶과 죽음은 서로 합하여 있다. 죽음은 삶의 한 사실인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잠시 숙고해 보면 죽음이 단순히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생에서조차 우리는 죽는다. 시작부터 끝은 거기 있었다."

왜 우리는 생의 마지막을 두려워하는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은 죽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은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생애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삶을 빈약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풍요롭게 한다고 결론지었다.

 

신제적 죽음은 인간을 파멸시키지만,죽음의 생각은 인간을 살린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죽음의 생각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구한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양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는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상태 거나 다음은 존재로 가득 찬 상태다.

사람이 존재를 망각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물질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매일 생활의 유회 속에 자신을 몰두시키게 된다.

그러나 존재로 가득 찬 상태는 물질의 길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감탄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은 계속해서 존재에 대해 깨우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흔히、존재론적 양식으로 불려지는데 존재에 대하여 마음이 가득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상태는 존재의 연약성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대한 책임 또한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존재론적인 상태이기 때문에,이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창의성(self-creation)과 접촉할 수 있어서 오직 이러한 상태에서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내가 인간에게 부여한 생명보다 인간이 더 오래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더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지 솔직하게 상상을 해봐라. 만일 네게 죽음이 없다면, 너에게서 죽음을 빼앗아 간 나를 끊임없이 저주할 것이다. 나는 네가 죽음에 너무 욕심을 내고 절제 없이 안아 수용하려는 것으로부터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 네가 죽음의 유용성을 보면서 죽음을 통해 약간의 쓴맛을 신중하게 혼합하였다.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이러한 적합한 상태에 너를 두기 위하여, 즉 삶에서 도망하거나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삶의 단맛과 쓴맛 사이의 것을 섞어서 조합하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통합은 인간을 구원한다.

이것은 인간을 존재의 공포에 놓이게 하는 중형을 구형하거나 비관주의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우리를 더 권위 있는 삶의 형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정화로서 작용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즐거움을 증진시킨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개인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낳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주인공 피에르는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공허한 삶의 무의미를 체험하며 삶을 죽음처럼 느낀다. 영혼을 잃어버린 이 주인공이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이 책의 900페이지에 걸쳐 묘사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피에르가 나폴레옹의 군대에 체포당해 사형이 확정되었을 때다. 여섯 번째였던 그는 앞에 있는 다섯 명이 자신의 앞에서 총살당하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기다렸다.그런데 바로 이 마지막 순간에 형 집행이 유예된다. 이 경험 이후 피에르가 생을 활력 있고 목적 있는 삶으로 살아 가는 변화된 모습을 이후 300페이지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열어 놓아 관계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자연적인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며,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었고,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 할 수 있었다.(실제로,도스토예프스키는 29세 때 형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집행이 유예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과 소설에 결정적 인 영향을 주었다.)

 

근본적인 삶의 사실에 대한 생동감 나는 감사 : 변화하는 계절, 바람,낙엽 등 .

 

암진단을 받은 이후 나는 아내와 다툰 적이 없다. 나는 아내가 치약을 아래부터 짜지 않고 위부터 짜는 것,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 것, 나와 의논없이 초대손님의 명단을 짜는 것, 옷을 사는 데 너무 많은 낭비를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내가 병을 얻기 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즉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것, 고양이가 귀를 긁는 소리를 듣는 것, 침실 램프 아래의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 것, 케이크 한 조각이나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여는 것 등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에 다가왔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정말로 인생의 의미를 맛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나는 불사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인생 중 건강이 가장 좋았을 때조차도 거짓된 자만, 인위적인 가치들, 그리고 터무니없는 경멸로 잘못한 일들을 기억할 때마다 몸이 떨린다.

 

나의 인생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이 두 가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라고 한다. 첫 번째 나는 신장투석을 하는 동안에 죽었다. 그녀는 죽음의 면전에서 인생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두 번째 나는 다시 태어났다. 캐시(Kathy)가 죽음 가운데 태어난 것이다. 첫 번째 캐시는 시시만 아이였다. 그녀는 음식점에서 식은 음식을 먹거나 외과간호 강의가 지겹거나 부모가 불공평할 때 불평을 아는 아이였다. 인생 목적은 주말을 즐겁게 놀며 보내는 것이었다…...미래는 먼 것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단지 하찮은 것만을 위해 살았다.

두 번째 케시는 지금의 나다. 나는 인생에 열중하는 사람이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보라! 정말 멋있는 푸른색이다. 정원으로 가보니 모든 꽃들이 예쁜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내가 첫 번째 캐시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의 전인적인 인생에서 멀어졌을 것이고.인생의 참다운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나기 전에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직면해야 한다,살기 위해서 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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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육체적 성질은 우리를 파괴시키지만,죽음에 대한 사상은 우리를 살린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삶의 통열감을 맛보도록 한고, 삶의 관점에 대한 급진적 변화를 가져다 주며, 분열과 고요와 자질구레한 근심으로부터 더 본질적인 삶의 유형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인간 삶에서 죽음의 협조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죽음은 인간 개개인을 하잘것없는 소일에서 벗어나 더 바른 목적과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한다. 죽음에 대한 전적인 자각은 개인의 급진적인 변화를 증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불안의 주된 요소다. 죽음은 인간의 내적 경험에 침투하고 인간은 개인적 역동들의 군집에 따라서 죽음을 방어한다. 그러나,죽음불안을 잘못 다루면 다양한 형태의 표징,징후,그리고 정신병리라는 성격경향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강요하는 이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심리치료에서는 죽음의 개념을 거의 포함하지 않는다. 죽음은 정신건강 분야의 거의 모든 관점에서 철저하게 간과되었다. 이론,근본적이고 임상적인 조사, 임상적 보고, 그리고 임상실습의 모든 형태에서 간과되는 것이다. 죽음이 무시되지 않는 예외적인 한 분야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볼 때뿐이다. 심리치료에서 문학에 출현하여 간헐적으로 죽음을 다룬 논문들은 일반적으로 2류나 3류의 연구지에 실려 있고, 그 형식도 일화(逸話)적이다.이 논문들은 호기심만 가득 차고 주된 이론과 치료에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만 남화대학 생사학과 생사학연구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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