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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바다
작성일
2012-12-23 19:21:56
조회수
2634
제목 : | 아상가 교수님의 강의 요약
 
오취온(五取蘊)이 고통의 근원인 이유,

 아상가교수의 사성제강의 고성제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합니다

 



bbs불교방송에서 정목스님이 진행 하는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의 말미에 나오는 멘트이다.


불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것도 거룩한 불성이다.

불성이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거룩한 불성에 경배드린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불성이란 하나의 초월적 인격체를 말하는 것일까.

 


불성이란 무엇일까

 


불성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나와 있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불성사상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불성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최초로 언급된 경전이 열반경이다. 대승경전인 열반경에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예로서 이마의 구슬의 비유(額珠, 액주)를 들고 있다.


이마의 구슬의 비유(額珠)란 어떤 장사가 씨름을 하다가 미간에 달려 있던 구슬이 피부 속으로 박혀들어간 것을 모르고 잃어버린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가 나중에 의사가 이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소중한 보배 구슬을 잃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로 본 불성


불성을 빠알리어로 산스크리트어로 붓다다뚜(buddha-dhatu)라 한다. 붓다다뚜와 관련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영어로 붓다네이쳐(Buddha-nature, 불성)라 불리우는 붓다다뚜는 마하야나불교(대승불교)의 가르침으로서 본질이 되는 것을 말하고, 또한 모든 감각적 존재의 마음속에 항상 있어서 완전하고 고귀한 깨달음에 도달 하기 위한 불사의 권위를 갖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불성은 아트만이나 자기개념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하게 정의된 空(, Sunyata)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 아이디어는 아비담마에서도 고려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아비담마는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니까야에 근거 하고 있다. 그러나 불성은 후에 마하야나의 경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테라와다불교 학파 에서 교설로 받아들여 지지 않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인도의 마하야나전통에서 명백하게 아니다라고 부정되고 있지 않지만, 일부논사들, 특히 중관학(Madhyamaka)과 관련된 논사들은 그 교설에 그 어떤 적극적인 흥미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성사상은 동아시아와 티벳불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사상과 수행에 있어서 신성한 종교적 믿음으로서 여겨지게 되었다.


불성은 오늘날 극동아시아불교의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불성사상이 중생의 마음은 번뇌의 때에 가리워져 있지만 본래 맑고 깨끗하다는 초기불교의 교설에 유래 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 교설을 인정 하지 않고 있고, 더구나 같은 대승불교의 중관학에서 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 한다.


다만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같은 극동아시아 전통에서만 가장 널리 퍼져 있고, 교리와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으로 간주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이처럼 중요시 하고 있는 불성사상을 산스크리트어로 따타가따가르바(Tath?gatagarbha)로 말한다. 이 말뜻은 부처의 자궁(Buddha womb)’을 의미하며 영어로 "the one thus gone"라 하고, 중국에서 여래장(?)이라고 번역 하였다.

 

 


극동 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여래장사상


요즘은 산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는 것이 유행이다. 템플스테이의 광고를 보면 대체적으로 참나를 찾아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이 때 참나라는 것은 진아(眞我)를 말하고, 우리말로 표현 하면 진짜 나를 말한다.


이 진짜 나를 또 다른 말로 불성이라고도 하고 법성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참나에서부터 진아, 불성, 법성, 주인공등 다양한 표현 방법이 있지만 모두 여래장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만 볼 수 있는 여래장 사상은 우리나라 교학의 최고봉이라고 볼 수 있는 화엄교학의 근본사상이다. 또 이 여래장 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는 논서가 대승기신론이다. 여래장 사상이 한국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을까. 이를 알려면 스님들을 교육하는 강원의 교과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강원의 3학년때 배우는 사교과는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으로 구성 되어 있다. 4학년 때 배우는 대교과는 오로지 화엄경 하나이다. 이들 경전들이 대부분 여래장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하는 법문은 항상 여래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불성, 법성, 견성, 성품등과 같은 용어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불자들 역시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 하는 것 또 한 한국적 특수상황에 기인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이들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아상가교수의 인터넷강의에서


초기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사꺄무니 붓다의 교설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의 진수는 사성제에 있다. 사성제에 대한 정의는 부처님이 최초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전하던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 잘 설명 되어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우주의 원리나 불성과 같은 개념에 대하여 말씀 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가 당면 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인 고통에 대하여 말씀 하시었다.


부처님이 단지 고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면 그는 틀림없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이야기 한 것은 고통의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고통과 고통의 소멸은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이런 초기불교의 사성제에 대한 강의를 불교 tv에서 들을 수 있었다. 스리랑카 빠알리어 경전연구의 권위자인 아상가 교수의 강의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18)를 통해서이다.

 

 


사성제가 고귀한 이유


아상가 교수에 따르면 사성제는 고귀한 진리라 한다. 왜 고귀한 진리일까. 그 것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다. 고귀한 진리라는 뜻을 빠알리어로 아리야 삿짜(Ariya sacca)라 한다.


아리야삿짜를 왜 고귀한 진리라 부르는 것일까. 여기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아리야삿짜는 고귀한 분들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통을 초월한 부처님과 아라한을 포함하여 고귀한 분들이 깨달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아리야삿짜는 진리자체가 고귀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귀한 진리라 한다.


셋째, 아리야삿짜는 이 진리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귀한 자리로 올려 놓아 주기 때문이다.



이 중 세번째가 가장 마음에 감동을 주는 구절이다. 아리야삿짜가 우리를 고귀하게 해 준다는 것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다.


이제까지 불자들은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절에 열심히 다니는 신도로서, 또는 열심시 보시하고 지계 하는 삶을 가진 불자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고귀하게 되려는 꿈을 꾸지 못하고 살아 왔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대승불교에서 말하고 있지만, 불자들을 성불로 이끌기 위하여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제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 하고 스님과 신도라는 이분법적 상황에서 성불이라는 말이 인사말 정도로 들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순례법회 당시 미황사의 금강스님의 말은 인상적이었다.


금강스님은 스스로 고귀해 지려면 참선을 하라고 말하였다. 참선을 하면 어떻게 스스로 고귀해 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이제까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참선을 권유 함으로서 재가자들도 스스로 고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고통의 의미는


사성제를 알면 스스로 고귀해 진다고 한다. 부처님이 발견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나면 당연히 성스럽고 고귀한 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성스런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사성제에서 하시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우선 고통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사성제에서 고통 그 자체도 성스런 고귀한 진리이다. 이런 고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m ariyasaccam: j?tipi dukkh?, jar?pi dukkh?, by?dhipi dukkho, maranampi dukkham,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m na labhati tampi dukkham: samkhittena pa?cup?d?nakkhandh? dukkh?.”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suffering: birth is suffering, aging is suffering, disease is suffering, death is suffering, association with the unloved is suffering, separation from the loved is suffering, not getting what one wants is suffering, in brief the five aggregates of grasping are suffering.”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생노병사의 4고와 좋아 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고통등의 8가지를 들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오취온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오온으로 해체하여 본 이유는


흔히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신과 육체, 영혼과 실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인정 하지 않는다. 이말은 변치 않는 정신이 있다거나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볼까.


불교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로 본다. 이것을 한자어로 오온(五蘊)이라 한다. , 물질적 형태(Material form, )로 이루어진 무더기, 감각 (Sensation, )의 무더기, 인식(Perception, )의 무더기, 형성된 현상이나 행동(Constructed phenomena 또는 Acts, )의 무더기, 의식(consciousness)의 무더기 이렇게 다섯 무더기가 모여진 집합체를 나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다섯가지 무더기로 우리를 해체하여 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내면에 영원불멸하는 혼이나 정신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이들 오온의 상호작용만 있을 뿐 이런 것들이 우리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집착(오취온)이 고통의 근원인 이유


이처럼 우리는 이들 오온을 통하여 우리자신을 매순간 매일 창조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초전법륜경에서 설한 오온에 대한 집착(오취온)이 고통이라고 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행위들로 특성지워진 인간의 삶은 슬픔으로 가득한데 이런 것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것은 나의 신체적 형태이고, 나의 느낌이고, 나의 감각이며, 나의 인식이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나란 것은 없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런 것들은 그저 일어 났다 사라지는 것들일 뿐인데, 우리가 자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 총합이 나 자신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지구상에 나타난 많은 종교에서 이를 뒷바침하기 위하여 내면에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 것이 영혼이 될 수 있고, 정신이 될 수 있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 될 수 있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이동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나의 불변하는 영혼이 지금 인간의 몸을 통과 하고 있지만 새나 파충류나 동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영혼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나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형성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온으로 해체하여 놓고 보면 영원하다고 불리우는 것도 없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것은 오온에 포개어 놓았을 때 단지 포개어 놓은 것일 뿐 우리체험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영혼이니 불성이니 하는 말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5가지로 분해하여 영혼이 없음을 잘 설명 하는 문구가 청정도론에 있다.



우리가 수레나 차량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부품들의 조합체이다.

모든 부품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나면 수레는 더 이상 없다.

우리가 수레라 부르는 것은 실로 그것들의 조합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있다.

하지만 부품이 없다면 수레는 없다.



이 말은 기계안에 유령이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말()이 없어도 달리는 기계장치를 보고 한 말이다.


옥스포드 대학에 옥스포드가 없는 것처럼 오온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말씀 하신 것이다.

 

 


고통은 소멸 할 수 있다


우리는 집착이라는 기반위에서 세상을 건설하고, 그 위에 또한 우리라가거나 영원, 불성과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런 개념들이 해체 될 때 슬픔에 잠기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건에 근거하고 있고, 조건 없이 존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생에서 다음생으로 넘어 가는 것도 어떤 변치 않는 정신이나 영혼이 가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넘어 가는 것이다.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조건을 남기는데, 의식 또한 조건에 근거 한다. 이 말은 영혼이나 불성과 같이 변치 않는 후보가 없다는 것을 의미 한다. 모든 것은 조건에 의지 하므로 조건이 없으면 의식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거짓된 나(我)나 나자신을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고통의 가장 미세한 철학적 의미는 집착의 다섯 무더기 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고통 그 자체를 말하는 평범한 고통이다.

둘째. 변화가 야기 하는 고통이다.

셋째.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 현상에 의한 고통이다.



이 중 세번째인 조건적 현상으로서의 고통을 설명 하는 것이 오온에 집착함으로 생기는 고통을 말한다.


여기서 현상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상카라(Sankhara)’를 말한다. 상카라는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어이다. 이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리적, 심리적, 생리적 현상을 포함 하는데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이 상카라인 것이다.


이런 조건에 의한 현상은 기본 적으로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고통 역시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소멸 될 수 있다. 만약 고통이 영원하다며 없앨 수 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고통에 대하여 말 하였을 때 사람들이 슬픔에 젖고, 눈물을 흘리라는 뜻으로 말씀 하지 않았다. 고통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해 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고통이라는 성스런 진리를 언급한 것은 고통의 소멸을 말씀 하기 위한 것이다.

 

 


불자들이 열등감을 느낄 때


법회에서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때, 부처님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지켜 보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를 금강경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여래실지실견이 될 것이다. 이를 좀더 실감 나게 표현 한다면 비데오 카메라로 다 찍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했는지 나중에 아뢰야식에 저장된 필름을 보면 다 알 수 있다는데, 열심히 보시를 한 사람은 천상에서 태어나는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떤 스님은 교회의 헌금과 비교 하며 이야기 한다.


불자들이 그들 보다 못사는 이유가 보시를 그들만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은근히 불자들의 자존심을 긁어 놓기도 한다. 그런 법문을 들을 때 마다 불자들은 열등감을 느끼고 주눅이 든다.

 

 

 


불자들이 자부심을 느낄 때


어느 법회에서 남방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다 돌아온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초기불교의 전법사들의 공통적인 현상은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 법문을 하는 데, 사성제와 팔정도와 같은 기초교리에 대하여 설명 하였다.


특히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참석한 모든 불자들은 의식이 크게 고양됨을 느낄 수 있었다. 법문을 듣는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고귀한 존재나 되는 것 같았고, 불교를 선택하기를 참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법을 전하는 법사에 따라 불자들의 의식도 달라진다. 어느 법문을 들으면 타종교에 비하여 열등감을 느끼지만, 또 다른 법회에서는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불교를 접하면 불자로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의식 또한 한 껏 고양되는데, 특히 사성제와 팔정도와 같이 부처님이 가장 강조한 사항을 들었을 때 고귀해 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은


아리야는 성스럽다, 고귀하다, 거룩하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 중에 84천법문이 있지만 아리야자가 붙는 것은 사성제와 팔정도 둘 뿐이다. 그 중에 사성제는 진리 중의 진리로서 가장 고귀하고 성스런 진리이다.


이와 같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법의 바퀴를 굴렸는데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 한다. 여기에서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대 인도에서 바퀴는 왕의 무장장갑차를 상징한다. 이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 내는데, 왕은 언제나 전쟁을 하여 합병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수레바퀴(cakka)

사진 ;http://3.bp.blogspot.com/_b-U_6dM4vDM/RsJvdn_c09I/AAAAAAAAAA4/b1RuqthWN_s/s1600-h/dhammacakka.jpg





어느 왕이 바퀴가 달린 장갑차를 몰아 이웃 나라로 진군 할 때, 이를 저지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그 왕을 받아 들인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것이 인도의 오랜 관습이었는데, 부처님도 전차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태자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갑차가 아닌 법의 바퀴를 굴리기로 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담마()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과 직면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이래 지금까지 법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바로 지금 사성제를 언급 하는 것도 부처님의 법의 바퀴가 마치 전차처럼 앞으로 굴러 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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