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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삶들이 모여 사는 ‘정토마을’ 능행 스님의 베푸는 인생(2005년 12월 우먼센스)
작성일
2012-02-20 19:59:44
조회수
2212








시한부 삶들이 모여 사는 ‘정토마을’ 능행 스님의 베푸는 인생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두들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요즘,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가’란 화두를 던진 이가 있다.

 

  호스피스 수행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함께한 능행 스님. 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음을 준비하라고 권한다.

 

  충북 청원군 구녀산 자락 정토마을, 말기 암 환자를 비롯해 평화로운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간이역으로 삼은 보금자리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은 넘치는 생명력이었다. 본관 앞 초록빛 잔디 정원 앞에 흐드러지게 핀 들국화가 가장 먼저 객을 반겼고, 곳곳에는 이제 막 꽃잎을 피운 듯한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능행 스님의 모습에서도 고요한 활기가 넘쳐흘렀다.

 

 천주교 등 여러 기관에서 호스피스 교육받다

 

 “죽음 보따리는 혼자 싸기 힘들잖아요? 혼자 싸기 힘든 보따리를 함께 싸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정토마을입니다. 죽음을 돌보는 일은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함께 준비해야 하는 일이지요.”

 

  ‘죽음’이란 단어를 이야기하면서도 스님의 목소리와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되는 것, 그래서 슬프기보다는 인간이 겪어야 할 여정으로 여겨지는 것, 이것이 능행 스님이 환자들과 살아가고 있는 정토마을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의 근원인 듯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능행 스님이 처음 죽음을 목도했을 때의 기억은 고통이자 충격이었다고 한다.

 

  “한 신도의 병문안을 간 병원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순간을 지켜봤습니다. 그때까지 전 고통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음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어요.”

 

  죽음 앞에서 고통으로, 혹은 좀더 살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본 후 스님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부산의료원 행려병동을 비롯한 소록도, 충북 음성 꽃동네를 찾아다니며 자원봉사 수행을 했다.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거의 비슷했다. 살아가면서 부질없이 부렸던 욕심을 후회하는 이, 좀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후회하는 이….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능행 스님의 화두는 한 가지였다.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죽음이 이리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까? 살아가는 일에는 기를 쓰고 작은 일도 준비하면서 왜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꺼리는 것일까?’

 

  능행 스님의 이 화두는 자연스럽게 호스피스 교육으로 이어졌고, 스님은 천주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며 죽음을 배웅하는 자세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계에는 마땅히 호스피스 교육을 받을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97년 어느 날 폐암으로 죽음의 기로에 선 한 스님을 배웅하는 길에 능행 스님은 앞으로 자신이 정진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 비구 스님은 평생을 선방에서 수행만 하다 마지막 가는 길 몸 누일 곳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비구 스님은 능행 스님에게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스님들이 편히 죽을 수 있는 병원 하나 지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비구 스님의 부탁은 능행 스님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고, 그 후부터 스님의 유언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2000년 청원군 구녀산 자락에 정토마을을 건립해 종교를 초월한 호스피스 수행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정토마을을 건립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금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마을 주민들의 반대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능행 스님은 비구 스님과의 약속, 더 나아가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병자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에게 정토마을은 삶과 죽음이 굽이치는 수행처입니다. 또 준비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호스피스 일은 저에게 수행의 길이에요. 고통 앞에 있는 이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현재 정토마을에 머물고 있는 환자는 10여 명.

말기 암 환자를 비롯해 뇌출혈 환자 등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남은 생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다.

 

  “정토마을은 불교계에서 건립된 최초의 호스피스 마을이긴 하지만 스님이나 불교 신자만을 위한 곳은 아닙니다. 또 암 환자뿐만 아니라 죽음을 목전에 둔 도움이 필요한 이라면 누구든 무료로 머물 수 있어요.”

 

  스님의 말씀처럼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 오게 된 사연도, 병명도 다르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남은 생을 값지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다. 스님이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 중 특히 결혼을 앞둔 처녀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

 

  

 

갑자기 급체한 것 같아 병원에 갔다가 급성위암 말기로 살아갈 날이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한 처녀는 약혼자의 손을 잡고 아버지와 함께 정토마을을 찾아왔다. 결혼을 불과 몇 달 앞둔 상태였다. 병원에서도 이미 치료를 포기한

상태라 물 한 모금을 넘기는 일조차 고통스러워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그녀의 어머니는 “돈이면 다 되는 이 세상에 왜 돈을 준다고 해도 저 아이를 못 살리느냐”며 살려달라고 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간호하는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아프지 마, 나는 어떻게 해? 선생님, 우리 엄마 주사 좀 놔주세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 그녀는 떠나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은 후에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리고 여섯 살이 되면 스님에게 와서 스님 제자가 될래요.”

 

  죽음에 다다른 순간 정신을 놓으면서까지 그녀는 아미타불을 부르며 떠나갔다. 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는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4개월 전 정토마을에 들어온 지눌 스님은 폐암 말기다. 그는 현재 한글로 된 <법화경>을 필사하면서 투병하고 있다. 스님이 처음 폐암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곳은 보건소였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따라 병원을 찾아 검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폐암 말기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을 때 스님의 마음에 든 생각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나만은 비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딱 이틀간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저는 만약 가족들이 본인에게 암이라는 걸 알리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빨리 알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야 살려는 의욕을 가질지 죽으려는 의욕을 가질지 본인이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지눌 스님이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은, 남은 시간 동안 맑게 깨어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미 암 판정을 받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지만 다른 이들만큼은 고통 없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제가 겪고 보니 암은 무척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요. 수행하고 일하던 시절이 무척 그리울 때가 많아요. 하던 일을 못하고 갑자기 한가해진다는 것은 무척 서러운 일이더군요. 그러니 저 말고 다른 분들은 이런 고통, 서러움 안 느꼈으면 좋겠어요.”

 

소풍 전날 밤 같은 설렘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면...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은 단지 호스피스 활동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간호사와 주치의가 상주하며 환자들과 함께 병에 맞서 싸워나가고 있으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환자에게 필요한 일을 도와가며 사랑을실천하고 있다. 그렇기에 정토마을에는 죽음의 어둠보다는 고요한 활기가,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운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토마을에서 한 해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이들이 100여명에 이를 정도. 능행스님은 이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고통스러운 죽음을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능행스님의 배웅을 받은 이들은 무려 1,000여 명. 정토마을뿐만 아니라 스님의 배웅을 요청하는 곳이면 새벽이든 밤이든 어디든지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해오며 스님은 처음보다는 죽음에 대해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죽음을 대하는 일은 스님에게 고통이고 슬픔이어서 누군가 정토마을 간이역을 떠나 저승으로 간 날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곤 한다.

 

  "그동안 많은 죽음을 접하며 제가 느낀 것이 죽음의 모습은 살아온 모습과 닮아 있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죽어가는 모습도 다르다는 것이지요. 결국 잘 사는 문제와 잘 죽는 문제는 전혀 다른 일이 아니고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역시 다르지 않은 일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말 속에서 10여년 전 처음 고통스런 죽음을 목도하며 '왜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인 셈이니 말이다.

 

  정토마을에 머무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 외에 호스피스 교육에도 실혐을 기울여온 능행스님의 바람은 이 세상을 살다 떠나는 이들이 소풍 가기 전날 밤 같은 기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러기 위해 환자들이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현재 정토마을은 공간이 좁아 한 방에 여러 명의 환자가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라 능행스님에겐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능행스님은 오래전부터 새로운 계획을 세워왔다. 새로운 계획은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호스피스 수행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으며 이미 울산시 언양에 새로운 부지가 확정돼 계약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새로운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4억원 정도의 비용이 모자라 스님은 전국 사찰을 돌면서 탁발수행에 나섰다. 자금 마련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나선 길이다. 정토마을을 건립할 때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마음을 비우고 가고자 하는 길에 전념했을 때 길이 열렸었기 때문에 지금의 탁발수행이 결코 힘들지 않다.

 

  능행스님과 정토마을에 머무는 이들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 활짝 핀 들국화가 다시 배웅을 했다. 들국화 사이로 가지런히 써 있는 글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삶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굳이 버려야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세요.'

 

  '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정토마을의 정신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거룩한 보살 자비행을 실천하고 계신 능행큰스님 이십니다.

얼마전 한 도반스님의 권유로 읽게 된 스님의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모르고 수행자라는 이름을 거론하기엔 너무나 안이한 나 이기에

한참을 멍하니 빈 하늘만 올려다 봤었다...

마음은 한가득 하나 실천하기 어려울 터인데  이렇게도 거룩하게 삶의 한 조각을 남을 위해 헌신 하심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취재 임현주(자유기고가)·사진 조세일   <우먼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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